숩닝 Komet 3
komet
수빈은 로프타고 내려온 무장 군인에게 얻어맞았다. 북한인가? 북한인가?! 라고 생각한 게 무색하리만큼 좋은 표준어 발음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국고 털어만든 내 집! 수빈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강 마리는 넘어졌냐? 끊어, 하고 끊었다. 요컨대 강 마리는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수빈은 이제 슬슬 올라오는 생존에 대한 압박 때문에 무장 군인이 하는대로 가만히 앉았다. 줄줄이 비처럼 내려온 군인들은 관사로 쳐들어가 1시간도 되지 않아 피칠갑하고 나왔다. 수빈이 살려달라고 빌기도 전에 카이 휴닝이 수빈을 붙잡고 우는 소리를 했다.
"아닛! 누가! 누가 이랬어!"
"... ."
"볼 거라곤 얼굴 밖에 없는데!"
어이가 없어서 잠시 사고 회로가 주춤거렸다. 살려, 살려달라고 빌어야 하는데? 수빈은 어물거리다 시기를 놓쳤다. 온 몸을 방탄조끼로 무장한 검은 사내에게 거꾸로 들렸다. 그제야 개미 기는 소리로 살려주심 안되나요, 하는 정직하고 단정한 소리가 나왔다. 손은 뒤로 묶였고 발바닥도 땅에서 떨어졌다. 사내는 로프를 한 손에 쥐고 수빈을 꽉 붙들었다. 그리고 하늘로 끌러올려갔다. 다 죽은 줄 알았던 관사에서 센티널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빈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누구도, 단 한 사람도 수빈과 무장 군인이 포진한 주차장을 보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수빈은 센티널들이 불이 난 쪽으로 달려가는 걸 망연자실하게 볼 수 밖에 없다. 센티널 관련 업무를 한 후로 는 것은 눈치다. 센티널이 능력을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눈치. 저 센티널들은 뭐가 잘못 된 건지 모른다. 수빈이 잡혀가는 중인 것도 모르고 하늘에 거대한 군용 비행기가 뜬 것도 모른다. 거꾸로 매달린 수빈은 관사가 레고처럼 보일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수빈은 무장 군인들 사이에 끼어서 안전밸트가 매어졌다. 안전밸트를 해준 누군가가 수빈의 정수리를 토닥였다. 퍽 정감 있는 손길이라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갈피도 못 잡았다.
한 밤 중에 군사적 요점 지역에서 납치 당하는데 이렇게까지 평화로울 수가. 카이 휴닝은 수빈의 맞은 편에 앉아 눈을 찡긋 거렸다. 꺼져 개새끼야. 비행기 내부에 들어서서야 고막이 찢어지는 엔진 소리와 한바탕 폭풍 같은 바람이 몰아쳤다. 소리를 가리고 모습도 가리고 심지어 바람도 가렸다. 이정도의 힘을 가진 단체에 잡혀갔을 때 취해야할 행동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저자세로 조용히 있기. 카이 휴닝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유치원생 마냥 긴장한 얼굴로 안전밸트를 꼭 쥐었다. 웃는 얼굴이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소풍을 떠나는 얼굴이다. 수빈은 이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꿈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엄마, 엄마 아들 잡혀가요. 수빈은 이 상황에도 차 할부를 생각했다. 12개월 할부로 차 값을 긁어도 괜찮았던 직장이여 안녕... . 가볍게 치부해보려 해도 눈물이 다 났다. 센티널들이 강철 구부리기를 이쑤시개처럼 하는 걸 매일 보다가 뇌의 공포 회로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몰랐다. 어떻게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지 잊은 사람처럼 수빈은 정갈하게 앉아 있다. 그런 수빈을 카이는 구경했다.
"한 숨 주무세요."
수빈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심지어 인스타 피드 새로고침을 하고 있었다. 자세를 바꿔 다리를 꼬자 바지춤에 숨겨져 있던 접이식 나이프가 떨어졌다. 노란머리 사내는 주섬주섬 나이프를 집어 넣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아기 고양이 밥 먹는 영상에 좋아요를 눌렀다.
"자라고요?"
"네, 적어도 7시간은 걸려요."
단조로운 어투로 대답해준 사내는 입을 닫고 고양이 영상을 서핑 했다. 분위기가 심각할 정도로 가벼웠다. 카이 휴닝 두 자리 옆은 초코바를 나눠 먹으며 시시덕거렸다. 이 졸개 같은 것들에게 납치당한 걸 알면 강 마리가 구해줄까? 믿을 건 센터장 강 마리 뿐인데 강 마리가 곱게 구해줄 거 같진 않았다. 욕이나 하다가 손가락 두 개쯤 썰리고 구출 당할지 모른다. 강 마리가 잘하는 짓이다. 여론 만들어서 자기 뜻대로 움직이기. 괴한에게 납치당한 한 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손가락 정도는 썰려야 정부가 움직일 것이다. 수빈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움직이시면 안 돼요."
"... ."
"안 본다고 진짜 안 보는 거 아니에요."
이 학주같은 새끼가? 학주는 여전히 인스타를 돌아다녔다. 수빈은 빌어먹게 긴장감 없는 상공에서 쇠심을 박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수빈의 온몸에 땀이 차서 손가락마저 미끌 거릴 때 비행기가 상륙했다. 한량처럼 놀고 먹던 사람들은 정자세로 착륙하기를 기다렸다. 검은색 군복 차림의 이들의 목적지는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자 살갗이 에는 듯한 추위가 몰려들었다. 여명이 뜨고 있다. 거칠 것 없는 지평선은 평평하게 고른 흙무덤 속에서 떠오른다. 학주는 수빈의 팔에 제 팔을 끼우고 걸음을 맞춰 천천히 걸었다. 모래에 발이 자꾸 빠졌다. 워커는 이제 검은색이라고 할 수 없는 색이다. 그들은 익숙한 걸음으로 서쪽을 향했다.
힘든 건 수빈 뿐인 거 같았다. 학주도 처음 비행기에서 내렸던 걸음 속도에서 줄지도 더하지도 않았다. 검은 목티를 코 끝까지 썼을 따름이다. 모래 바람을 아침 밥 대신 퍼먹는 중이던 수빈은 카이 휴닝의 뒷통수를 끊임 없이 째려보았다. 잠도 제대로 못 잔 몸뚱어리가 죽죽 늘어졌다. 학주는 수빈의 팔짱을 빼지 않고 그저 앞으로만 이끌었다. 곧이어 하늘 꼭짓점을 찍어버릴 것 같은 큰 암석 덩어리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붉은 색의 암석은 모래가 켜켜이 쌓여 생긴듯 색이 다른 줄들이 박혀 있었다. 수빈은 마른 입술을 한 번 축였다.
사암 덩어리가 조각된 오래된 왕성은 이미 죽은 유령의 도시 같았다. 사람이 기둥을 떠받힌 모양이 위로, 위로 서 있었다. 사암의 내부는 싸늘했고 학주는 목티를 아래로 내렸다. 대충 쌓아놓은 총기와 방탄복 무더기가 구석을 차지했고 가장 안 쪽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숫자를 셌다. 모래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건설된 사암의 성은 바람이 들지 않아 껄끄러운 모래가 들어오지 않았다. 수빈은 그곳에서 수빈을 만났다.
그러니까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만났다.
파란 머리. 슬랙스와 까만 애나멜 구두. 떨고 있던 다리를 멈춘 수빈은 수빈을 보고 활짝 웃었다.
이 괴담 같은 이야기가 최수빈이 쓰는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강 마리는 또 다른 강 마리를 만난 적이 있다. 늙은 강 마리였다. 여전한 칼단발에 여전한 수트차림이었지만 늙은 강 마리는 후두암 수술을 했다. 그래서 조금은 거친 목소리가 나왔다. 후두암이 전이가 되어 폐에서 재발했다. 늙은 강 마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늙은 강 마리는 자신의 과오에 대해 말했다. 후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강 마리는 늙은 강 마리를 카페에서 만났다. 카페에 앉아 점심시간을 떼우던 강 마리는 자연스럽게 제 앞에 앉은 늙은 강 마리를 보고 온 몸을 굳혔다.
홍수가 날거야.
강 마리는 좋지 일이 일어나는 걸 홍수라고 말했다. 모태신앙이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홍수가 나고 방주에 탄 것들만 살아남은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펼친 성경에서 읽었다. 그 이야기가 기억에 오래 박혀 해묵은 버릇을 만들어낸 걸지도 모른다.
사람을 보내 줄게. 비밀은 아니야. 네가 많은 걸 알면 알 수록, 사람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록 좋아.
늙은 강 마리는 강 마리에게 제가 아는 모든 걸 털어놓았다. 늙은 강 마리는 제약회사의 팀장까지 올라갔으며, 센티널 센터에서 의료 지원을 맡았다. 센터로 이직해서는 관사의 의료동에서 일했다. 기밀을 열람하지는 못하지만 기밀을 알 수 있는 사람 바로 아래서 일했으니 아는 건 많았다.
전쟁이 일어날 거란 걸 알고 있어?
늙은 강 마리는 여전히 괄괄 했고, 힘이 넘쳤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웃는 얼굴을 멈추지 않았다. 늙은 강마리가 떠난 후, 강 마리는 바로 센터로 이직하고 센터장으로 취임 했다. 같잖은 도덕심이 아니었다. 그래야 할 거 같아서였다. 강 마리는 늙은 강 마리가 말했던 사람들을 모았다. 일부는 늙은 자기자신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일부는 곧 만날 사람들이었다.
미래의 사람들이 사람을 계속해서 보냈다. 강 마리는 3년 전에 일어났어야 할 전쟁을 하루 하루 막았다.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강 마리는 사람을 수소문해 무엇과 싸우는지 물었다. 그들은 그것은 상관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전쟁영웅이었으나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강 마리는 늙지 않은 최 수빈을 최 수빈 보다 먼저 보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늙지 않았다.
일찍 죽었어?
최 수빈은 답하지 않았다.